본문 바로가기

그 외 장르

정조 - 의빈성씨 관련 잡담

반응형

 

 

 

 

 

 

드라마 이야기는 아님 ㅇㅇ

 

정조와 의빈 성씨의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다보면

정조의 찐사랑은 의심할 수 없게 되는데 

의빈 성씨의 기록 자체는 찾아볼 수 없어서 

의빈 성씨에 대한 궁금즘이 더욱 커지게 된다. 

 

 

의빈 성씨가 정조의 요청을 두번이나 거절한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역시 아래 두가지 이유가 제일 큰 것 같다. 

"효의왕후에 대한 미안함" + "후궁이 되는 부담감" 

 

 

연애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이고 특히 왕과 궁녀와의 관계에서는 

왕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서 거절 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듯. 

 

의빈 성씨의 관련 기록 자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면

첫번째 요청도 직접 이야기하고 직접 거절 했을텐데

(그리고 직접 흑역사를 적음) 

 

사도세자 죽음 이후의 불안한 시기를 같이 보낸 

정조, 의빈 성씨  ( + 효의 왕후 ) 의 관계가

일반적인 왕, 궁녀, 왕후의 관계가 아니였기에 

이런 개인적인 요청과 거절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20년간 의빈 성씨를 후궁 반열에 두었다고 하니

아마 의빈 성씨가 10때 처음 입궁했을 부터 계속 마음에 두었었던 것 같다.  

 

처음 정조가 승은을 내릴때 의빈 성씨는

효의 왕후에게 아직 후사가 없다고 거절하였고 

더이상 참지 못하고 정조가 15년 후 두번째 청을 했을때에도

여전히 효의 왕후에게는 후사가 없는 상태였다. 

 

정조는 처음에는 거절을 받아들였으나 

두번째에는 정조 30, 의빈 성씨 29으로 적은 나이가 아니여서 

정조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번째 요청에 효의 왕후에게 세자가 있고 다른 자식들도 많으면

차라리 허락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그러면 또 왕위 싸움에 휘말리게 될테니.

 

정조가 아래 적은 것으로 봐서 의빈은 후궁이 되는 것보다 

아들이 태어나 정쟁에 휩싸이는 것을 더 두려워 했던 것 같다. 

영조-사도세자의 비극을 옆에서 보고 자랐기 때문에 아마 더욱더 두려웠겠지. 

 

낮은 신분으로 베풂을 받아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구나.

 

 

사실 의빈 성씨가 일기를 작성한 것이 아니면

의빈 성씨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기록에 나타난 모습으로 보면 

적어도 일반적인 후궁의 관계가 아닌 벗 또는 그 이상으로 보인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더욱더 느끼는 것은 빈이 아니면 

내가 잘못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어질게 타이르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새벽닭이 울 때 너에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하게 흘러가는 모양처럼 봤다.

 

공허한 마음으로 생각하니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 곧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느른하게(맥이 풀리거나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다) 되돌아보니 내가 무료 할 때 빈과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기록을 통해 본 의빈 성씨는 

두번이나 왕의 요청을 거절할 정도로 강단있고, 

효의 왕후와의 우정을 간직할 정도로 의리있고, 

학문적 호기심도 많고 재주가 많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정이 깊고,

자식을 깊이 사랑한 사람이였다. 

 

 

정조도 한 매력 하는데 ( 지력 + 무력 + 불우한 어린시절 + 성격 )

그 정조가 구구절절하게 매달릴 정도로 매력있어 ㅠㅠ

 

 

 

 

 

 



출처: https://adana.tistory.com/entry/정조-의빈성씨-기록-정리 [덕질은이렇게즐거운거였어]

 

정조 - 의빈성씨 기록 정리

원래 정조 - 의빈성씨 이야기 너무 좋아해서 최근에 옷소매 붉은 꽃동 드라마 이야기를 보다 생각나서 실제 기록들을 정리해둡니다. 정조가 원래 일중독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실록에

adana.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