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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 의빈성씨 기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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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조 - 의빈성씨 이야기 너무 좋아해서 

최근에 옷소매 붉은 꽃동 드라마 이야기를 보다 생각나서

실제 기록들을 정리해둡니다. 

 




정조가 원래 일중독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실록에까지 적혀있을 정도였는데

의빈성씨는 유일하게 본인이 직접 선택한 후궁이였어요.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죠 

정조가 15살에 관례 올리고 정식으로 후궁을 들일 나이가 되자마자 요청하고 거절당하고(...)

15년 후에 한번 더 요청하고 또 거절당하고(...) 결국 다른 이들을 벌하겠다고 해서 받아들이죠. 



 그래서 후궁도 늦은 나이에 되었는데

그 전까지 왕비, 후궁들의 후사는 커녕 임신 소식도 전혀 없다 

정조의 첫 아이를 출산했을 정도로 거의 정조의 일생을 건 사랑 ㅠㅠ/



후궁이 되고 거의 매년 임신 기록이 있어서 

이건 좀 힘들었겠다 생각할 정도로;;

 

( 사실 문효세자 이전의 임신 과 유산 기록은 이재난고에 적혀있는데 

 

정조가 직접 적은 빈묘지경에서는 기록이 없어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의빈 성씨가 사망한 이후 비문이나 제문도 직접 정조 본인이 다 적었는데 

내용이 너무 절절합니다 ㅠㅠ

 

 

제문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아래 구절입니다. 

 

새벽닭이 울 때 너에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하게 흘러가는 모양처럼 봤다.

 




참고로 정조는 의빈 성씨가 사망한 중희당을 평생 본인의 집무실로 썼다고 합니다. 

 

정조 자체도 원래 매력있는데 이 이야기도 진짜 파면 팔수록 매력있는 이야기임. 

 

 

 

 

 

 

 

 

 

 

제문 원본

 

 

 

 

어제비문(御製碑文)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2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 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며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 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

 

 

 >> 첫째 아들과 딸을 먼저 보냈는데도 의빈의 죽음이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고 적었을 마음이 안타깝다. 나는 죽을수도 없다는 표현도 그렇고 그냥 피를 토하면서 적는 느낌.  그런데 다른 기록은 원본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 기록은 원본을 찾지 못했다. 

 

 


 

 

어제의빈묘지명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1762)에 궁중에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 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1]했다. 그 달에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효의왕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侍寢)[2]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처음 (1786)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賤臣)[3]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 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 하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焚黃)[4]을 예로서 중지해달라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 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飯含)[5]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濫授)[6]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 지 20여 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宮掖, 각 궁에 있는 하인)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尙論)[7]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金石)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撰次)[8]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1753)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成仁輔)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松國)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문정의 큰 아들은 석린(石璘)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石瑢)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石因)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靖平)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萬種)은 제릉(齊陵)[9]의 참봉이고, 고조 경(景)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윤우(胤祐)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10] 인의(引儀) 임종주(林宗胄)의 딸이다.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 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 정조가 후궁 의빈 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쓴 묘지명. 의빈 성씨가 사망한 1786년(정조 10년)에 작성했다.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2번이나 차인 흑역사와 끝내 맺어진 러브 스토리를 직접 기록했다. 본명은 성덕임. 중인 출신으로 10살에 일찍 입궁하여 혜경궁 홍씨 옆에서 자람. 정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대충 타임라인을 만들어보았다. 

 

1752: 정조 탄생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차남)

1753: 성덕임 탄생 ( 1753년 음력 7월 8일생, 본관 창년, 아버지 증찬성 윤우, 어머니 정경부인 임씨 )

        효의왕후 탄생 (1753년 음력 12월 13일생)  

1756: 성덕임 어머니 사망

1762:  세손이였던 정조 효의왕후와 혼인 (2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성덕임 입궁 (10살, 혜경궁 홍씨가 옆에 두고 친히 키움, 정조의 여동생들과 친하게 지냄)

1766: 정조 첫번째 차임 

1775: 암살 위기에 시달림

1776: 정조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름 

1777: 정조 암살 시도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

1781: 정조 두번째 차였으나 노비에게 벌을 내려(...) 성공(...)

1782 : 문효 세자 탄생 (9월), 문효 세자 원자 책봉(11월), 궁인이였던 성덕임 소용(정3품) 봉작(12월 28일) 

1783:  성덕임 의빈(정1품)으로 진봉( 2월 19일) 

1784: 옹주 탄생하였으나 3개월만에 사망

1786: 문효 세자 홍역으로 사망, 의빈 성씨 사망(34세), 정조 어제의빈묘표, 어제빈묘지명 기록

1800: 정조 사망

 

>> 1753년 :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 1762년 

 

1761년 겨울에 세손빈 간택을 하니...(중략)...세손빈(효의왕후)이 재간택 후에 즉시 천연두를 앓으시고, 뒤이어 세손(정조)이 앓으시니라. 증세가 극히 순하긴 하나, 삼간택이 가까운데 세손 부부가 연하여 큰 병환을 지내시니...(중략)... 세손의 천연두는 1761년 11월 그믐에 시작하여 12월 10일 즈음 나으니, 이 일이 보통 집이라도 기쁘리니 이는 나라의 경사가 아니냐...(중략)...하늘과 조상이 몰래 도우셔 세손과 세손빈이 차례로 천연두를 보내니, 또한 드문 일이오, 나라에 전에 없던 경사라. 12월에 삼간택을 하고 1762년 2월 초2일에 가럐를 행하니, 막대한 경사 가운데 일마나 조심하고 마음 쓰던 일이야 어찌 다 기록하리오 (한중록)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정한 정치판에서 끝내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 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할아버지 영조에게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영조는 "누가 얘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느냐. 데리고 나가라"며 쫓아냈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외갓집으로 내려가지만 곧 혜경궁 홍씨와도 생이별해 경희궁으로 돌아간다.

 

>> 1775년 

‘역적의 아들’인 정조는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적들한테 세손 시절부터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그의 세손시절 기록인 <존현각일기>엔 “이때 적도(賊徒)와 역당(逆黨)들이 흉모(凶謀)를 빚어내고 얽어내어 위태롭게 만들려는 계략과 협박하려는 꾀가 날로 더욱 급박하게 이루어지니,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략) 흉도들이 내가 거처하는 집을 엿보아 말과 동정(動靜)을 탐지하여 살피지 않는 게 없었기 때문에 또한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하였다”(1775년 윤 10월5일) 같은 기록이 심심찮게 존재한다.

 

 

>> 1777년 :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은 강용휘 등의 자객들이 존현각의 지붕을 뜯다가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던 정조가 그 소리를 듣고 승지 등을 불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이매망량이나 쥐 따위로 취급하고 사건을 덮으려 할 때 홍국영이 전격적인 수색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이 사건이 밝혀진다.

 

>> 1782년 :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임금의 승은을 받은 궁녀가 아들을 낳으면 후궁으로 삼는다"는 관례에 따라, 궁인 성덕임을 소용(정3품)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나이 30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가진 자식이 아들이라는 것에 무척 기뻐했다.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9월에 영조와 정조가 태어났는데 이 달에 아들이 태어나다니 대단한 길조'라고 평했다.

 

>> 1783년: 문효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이 안 된 1782년(정조 6년) 11월에 원자로 책봉 되었다.

 

 

정조는 좌의정 이복원(李福源)과 우의정 김익(金熤)에게 빈호를 의논해서 정하라고 했으나 직접 '의(宜)'자로 정했다.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어제의빈묘표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고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정전이 아닌 천신을 향해 있는데 병에 걸려 위독해진 것은 어울리지 않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정전에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감히 당석(잠자리)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 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고조부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고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를 추증한 일은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이기 때문이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왕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후세 사람들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하게 여기고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게 할 따름이다.

 

 

>> 어제의빈묘표는 정조가 1786년(정조10년)에 썼다. 어제의빈묘표의 탁본이 예술의 전당에 전시되었을때 보도자료에 탁본의 연도(혹은 비석을 세운 연도일 수도 있다), 서(書)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이 함께 1책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어제의빈묘지명 또한 1786년(정조 10년)에 쓰였다.

 

 

 


 

<어제의빈치제제문>

 

 

건륭 51년 병오(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7일 정축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유제하니 다음과 같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 같이 슬프다. 죽음으로서 떠나보낸 재앙은 비통하고 참혹하며, 인정과 도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이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보다 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위로하고 애써 떨쳐 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갔다.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근심하지 않는 얼굴로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빈의 죽음 때문에 이와 같이 슬프다.
아!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고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참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할 길은 여기에 있고 도리를 떨쳐낼 방법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제사 때 올리는 음식과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뜻을 표하는 글을 내려서 죽은 아랫 사람을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견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장차 상여가 무덤에 무사히 이르기를 바란다. 내 마음은 너를 떠나보내는 것이 어렵고 힘들구나.

노제.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행부사직 서유경을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가까워진 만사(죽음을 애도)는 그동안의 화목함을 실어 배향(공로가 있는 신하의 사당을 세움)하니 가는 길을 명주로 어여쁘게 채우지만 걱정스럽구나. 임금을 만나고 가는 길이니 서두르지마라.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비단은 일렬로 늘어져 있고 관 줄을 열어 염을 하고 소악을 씌우니 휘장은 소용돌이치는 모양새다. 바람 소리가 슬픈 밤에 술잔을 올린다. 빨리 보고 싶어도 홀연히 떠나버렸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제사를 지낸다. 낮은 신분으로 베풂을 받아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구나.

묘소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우부승지 홍명호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새벽닭이 울 때 너에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하게 흘러가는 모양처럼 봤다. 혁옥(가죽을 펴서 지붕을 삼은 집)에서 아침에 흘러간 물은 해질 무렵의 산에 한 번 떠나가 버렸다. 네가 한줄기의 광명으로 밝게 인도했으나 저승으로서 영원한 이별을 했다.

사후토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총융사 김사목을 보내어 삼가 고한다. 이제 땅의 신에게 속한 의빈 성씨는 여기에 없고 율목동 무덤에 있다. 빈의 행동은 얌전하고 정숙했고 어진 품덕을 갖춘 것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한 골육이 같은 맥락에서 신도 위하였다. 엄숙한 모양으로 꾸짖고 다스리지 않았으며 상서로이 숨겨서 봤다. 작은 힘으로 지켰으나 대가 끊어져 어려워졌다. 천사(千斯)를 삼감으로서 제사에 쓰는 술과 포와 육장을 땅 귀신에게 올리며 청하기를 고한다. 부디 흠향하라.

임광전. 건륭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나는 너의 죽음에 대해 반신반의 한다. 근심하는 사람의 마음은 썩은 것과 같다.

제주전. 건륭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몸이 집으로 돌아온다면 넋도 곧 여기 와서 이 집에서 아무 탈 없이 단장하고 편하게 지낼 텐데 어찌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언덕 구석으로 가서 혼이 되었단 말인가. 임금이 무릇 완연히 의지 했는데 어찌하여 아이는 태어나지 못하고 더욱이 또한 어머니도 멀어졌단 말인가.

초우전(장사를 지낸 후 첫 번째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60]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반우(反虞)를 지내고 나서 빈의 신주가 무사히 사당으로 가기를 청한다. 여기에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협사(祫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재우(장례를 치룬 다음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1일 신묘.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돌이켜보니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재우(再虞)를 지내고 때를 맞춰 가서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에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우사(虞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삼우(장사를 지낸 뒤에 사흘 째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임진.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돌이켜보니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삼우(三虞) 때 빈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가서 모두 함께 울었다.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성사(成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갑오. 국왕은 금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돌이켜보니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졸곡(卒哭)을 지내고 보니 빈은 여러가지 온갖 일을 겪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찌한단 말인가.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성사(成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초전(初奠). 건륭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시간이 흘러가서 초하루에 감추어지더니 빈이 돌아오지 않는 한 가지에 탄식하고 속죄한다.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려 제를 지낸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망전(상중의 매달 음력 보름날 아침에 제사 때와 같이 음식을 차려서 지냄). 하늘이 준 기회는 그 달 동안 갑자기 옳지 못한 곳으로 가버렸다. 아무리 빈의 자취를 늘어 놓아도 마음은 극에 달하도록 상한 것과 같다.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려 제를 지낸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생신차례(죽은 사람의 생일에 지내는 제사). 생각도 못한 일인데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더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더니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잔치를 하고 즐겁게 놀았었는데 조용하고 잠잠해져버렸다. 공허한 마음으로 생각하니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 곧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느른하게(맥이 풀리거나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다) 되돌아보니 내가 무료 할 때 빈과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건륭 모년 모월 모일 국왕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왕이 신하를 보내서 제사 지내게 함) 한다. 빈의 대상(大祥: 3년 상을 마치고 탈상하는 제사)은 선희궁(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라서 지냈다. 또한 담제(禫祭: 3년상을 치르고 두 달 뒤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오랫동안 생각 하는데 세월이 멀어지는 것은 가히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더욱더 느끼는 것은 빈이 아니면 내가 잘못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어질게 타이르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빈이 죽은 뒤의 명예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더욱 더 높이 받들어져 귀해질 것이다. 이에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낸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어제 제축문을 지었다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삭제. 건륭 모년 모월 모일 국왕(정조)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왕이 신하를 보내서 제사 지내게 함)한다. 쉬지 아니하고 가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새 초하루에 이르렀다. 이에 금의(今儀)를 행하는데 슬프고 애통한 마음을 어찌 견디겠는가.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망제.건륭 모년 모월 모일 국왕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고 달라지는 번영과 쇠락은 이렇게 어찌하여 해와 달처럼 아득히 멀어졌는가. 내 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애달프다.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생진다례. 건륭 모년 7월 모갑 삭초 8일 모갑 국왕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 한다. 문효세자의 어머니가 되는 의빈의 일생은 하지가 지났는데도 오로지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이 없는데 어찌하여 아니 돌아오는가. 문효세자를 잃은 너의 예사롭지 않은 슬픔을 생각하건대 잠시 울컥 쏟아진 슬픔이 아니었다.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기일. 건륭 치세 모갑 9월 모갑삭 14일.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바뀌어서 하지가 지나자 빈의 기신(기일을 높여 이르는 말)이 되었다. 밝은 날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제사를 지낸다. 빈이 문효세자를 낳던 날 밤에 하늘에서 비춘 붉은 빛은 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사로이 말하건대 죽어서 종묘에 봉안 되어도 빈을 영원히 잊을 수 있겠는가.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 정조가 의빈 성씨의 상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간 각종 제사를 지낼 때 어제 제축문을 썼다.

 

 

참고:

https://brunch.co.kr/@iulius36/3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642598&no=318&week=wed&listSortOrder=DESC&listPage=2 

 

조선왕조실톡 - 311. 너같은 여자 처음이다

311. 너같은 여자 처음이다

m.comic.naver.com

https://m.blog.naver.com/duqhdigmlwns/222113352032

https://namu.wiki/w/%EC%96%B4%EC%A0%9C%EC%9D%98%EB%B9%88%EB%AC%98%EC%A7%80%EB%AA%85

 

https://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10274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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